2004-02-04
은행잎은 다 썩지 않았다. 누런 잔디위로 마르게 쌓여 봄이 오기 전에 싹터오는 풀을 감싸주고 있다.
소리없는 것끼리의 포옹이었다.
오늘은 절기상 입춘이지만 스치는 바람이나 나무들을 보면 아직은 한창 겨울이고, 나는
구석구석이 따듯하던 아랫목을 그리워하고 만다.
봄은 내게 아직 낯설다.
그동안에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던 줄기가 마르고 가시는 쪼그라든 장미나무에서 팔랑이는 검은 끈을 본 순간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바람이 황량하게 불었다. 걷잡을 수 없는 휘몰이였다.
햇살이 양철지붕으로 떨어질 때 처럼 찬란하게 부서질 때였다.
그 빛의 끝은 차가왔다.
몇 발자국 앞에서 깡총이며 뛰어가는 아이의 안전을 몰라라 하고 검은 쇠울타리에 묶여있는 끈을 보며
먼저 떠올린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슬픈 리본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몇 줄기는 꺽여 있었지만 저 끈은 분명, 햇빛에 바래고 바람에 흔들려 닳을지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죽음보다 더 강한 끈이라는 생각으로 바꿔갔다.
어쩌면 그 끈은 잎이 무성하고 흠모가 가장 정열적이던 빨간 장미꽃이 다북할 때도 묶여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람은 겨울에만 세차게 부는 것은 아니였다. 아무때나 마음대로 불어와서는
견디지 못하는 약한 물체는 즉시 쓰러뜨리는 두려운 것이 아니던가!
만약 저 끈을 여러 사람들이 가던 걸음을 멈춰 향기를 맡곤 하던 여름에 보았다면,
한 계절을 노래하기에 손색없을 장미꽃의 자연스러운 낙화를 막는 무미함으로 느껴져 오늘처럼, 애잔한 눈길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울나기란 사람을 비롯하여 동.식물까지 힘든 일이다.
고드름이 끊어질 날 없이 추위가 대단하던 오래 전에도 살아났는데 이깟 추위는 견딜만하다지만,
정작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황폐함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게 가슴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은 한 잔의 따끈한 차보다는 한 사람의 꾸미지 않은 위로가 더 그리운 법이다.
어쩌다 눈에 띈 볼품없는 끈을 두고 의미를 너무 장황하게 갖는 나,
그건 굳이 詩的의 여운이 아니라 이런저런 벽에 부닥혀 많이 지쳐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에 탄력이 붙어 하루 중 가장 소중하거나 맘에 드는 시간은 글을 쓰는 때였다.
늑골에까지 배여있는 외로움이나 삶에 대한 갈증,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부끄러움없이 들춰내며
나는 점점 나한테 솔직해질 수 있었다. 막힘이 없는 사유는 언제나 두레박을 가득 채우는 우물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혼자여도 살 수 있으리라는, 글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적어도 그 때만큼은 나를 묶어 줄 끈이 필요없을 줄 알았다.
홀로서기! 얼마나 아름다운 고즈넉함인가,
그 시간이 길다보면 늪이 되리란 걸 모르는 정신적인 허영이 그득하기만 했는데...

글은 누구를 위해 쓰며, 왜 써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버럭버럭 짙어지더니
급기야는 항상 물이 찰랑이던 우물에 이끼꽃만 잔뜩 피어났다.
공기가 꽉 들어차 팽팽하던 날을 되찾아오고 싶은 갈증은 나날이 심해졌다.
말똥하던 의식은 미로를 헤매듯 방황을 하고 한 줄의 글을 이어가기란
끼니를 놓치고 사방공사에서 흙을 나르던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시절처럼 힘에 부쳤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은 갖을 수 없었다.
잠시적인 침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깨기 힘든 무능력으로 다잡아보기도 했다. .
그럼에도 기름기가 이미 빠져버린 땅은 어떤 방법으로 흙갈이를 한대도 옥토는 될 수 없었다.
검은 빛으로 죽어가는 황무지의 하늘로 쇠기러기가 날아가는 하늘이 환상으로 떠올랐다.
절대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지 않는 절제가 배인 자유를 원하는 것으로서,
나를 가둔 망을 뜯어내지 못해 앓는 날이 부쩍 잦아졌다,
그에 대한 후유증은 마음 내리는 것마다 詩가 되어주던 날을 잃고 허허벌판을 헤매게 한다.
하지만 쓰러진 자리가 곧 일어설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고 싶다.
그러기에 더는 깊은 계곡으로의 추락을 은근히 갈망하는 나의 이 혼미한 정신을
죽음이 다가서지 못할 정도로 붙잡아 줄 수 있는 질긴 끈이 필요하다는 건데
줄기는 꺽어질망정 결코 죽지 않을 장미나무야,
바람이 나한테로만 강하게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게, 그 검은 끈을 내게 줄 순 없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