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울만큼만 사랑하자 *** 김현수 ***
  철길 6-10 2019-12-23
그 어떤 누구도 스스로 깨트릴 수 없는 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임을 알게 한 그 해 여름,
지섭은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고 그저 기다리라고만 하고 돌아간 규은일 첫 날은 바쁘겠지 하는 이해로,

둘쨋날엔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하는 조바심으로 기다렸지만, 세쨋날부터는 이럴 수는 없다고

원망이 깊어졌지만 입 안이 군데군데 곪을 정도로 예민하게 규은일 기다렸다.

그런 감정이 쭉 이어지면서 전화기를 바라보는 지섭의 눈빛이 바람에 일렁이는 촛불같았다.

당장이라도 수화기를 들어 왜 이래야 하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던 건,

그래야 규은이가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쓰러지지 않을 기다림을 위해선 째깍이며 돌아가는 마음의 시계를 꺼놔야 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싶지 않았고, 끼니조차 생각나지 않게 무미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자 뜨락의 나무도 꽃도 풀도 까무룩하던 하늘마저 생기가 돋는데

지섭한테선 물기 밴 책을 말릴 때 풍기는 마른 내음이 났다. 흠흠거리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그만큼의 조용한 통증이었다.
줄기차게 내리던 장맛비가 걷히자 지섭의 어머니는 동해로 휴가를 가자면서 이왕이면

규은이도 데리고 갔으면 했다. 허나 지섭은 좋다 싫다를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제의를 반길 줄 안 지섭의 어머니와 동생 지혜는 좋은건지 싫은건지 종잡을 수 없이

무표정한 지섭을 흘금거리며 싸웠는지를 물어오는데,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아니라고, 싸운 게 아니라고 부인하기조차 버거워졌다.
"오빠, 내가 언니한테 전화해 볼까? 종강했으니까 언니도 시간있을 거 아냐?

엄마, 내가 언니한테 전화해 볼게..."
지섭은 수화기를 든 지혜를 막지 않았다. 실은 그렇게라도 해서 규은이를 만나고 싶었다.
"언니, 나, 지혜...뭐해? 응? 그냥 있다고? 왜...근데 언니, 어디 아파? 목소리에 힘이 없네? 응?

안 아프다고? 그럼 언니, 우리 며칠 후에 강릉으로 휴가 떠나는데 같이 가자.

엄마가 언니도 같이 갔으면 하는데... 응? 안된다고? 왜? 바빠? 뭐가? 그냥? 에이...그냥 바쁜게 어디 있어?

응? 정말 안된다고?에이...같이 가자......언니야...응?"

규은이 뭐라 하는지 지혜가 콧소리를 내가며 말을 하는데,지섭의 어머니가 바쁜가본데 너무 보채지 말라며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전하라 했다.
지섭은 규은이와 실강이를 벌이다시피 하는 지혜한테서 수화기를 뺏어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기다려야 한다는..무조건 기다려야 한다는 어떤 오기스런 마음이 일었다.
"언니,꼭 와야 해? 꼭 올거지? 알았어, 기다릴게. 응...응...."
"규은이 온다니?"
"응, 엄마, 근데 온다고는 하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네..언니 아픈가봐. 오빠, 언니 어디 아파?

그러고보니 오빠도 요새 며칠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언니도 안 만났나봐?

정말 둘이 싸웠나보다..에이. 나는 언니 편인데, 혹시 오빠가 잘못한 일 있어?

그러면 나는 오빠하고 말 안할거다..나는 무조건 언니편이야.후후후..."
"지섭아, 정말 규은이랑 싸웠니? 요즘 애들같지 않게 조신하면서도 명랑해서 나는 참 좋더라..

가정교육도 잘 받은 것 같고...우리 지혜도 규은이 반만 닮으면 좋을텐데...

남의 집 자식이지만 욕심나는 아이야..."
"어머?, 내가 어때서? 언니가 워낙 착하고 예뻐서 그런거지 나도 보통 이상은 된다 뭐? "
지섭은 어머니와 동생의 대화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사소하게 내건 약속일지라도 꼭 지키려고 하던 규은의 정갈함이 지섭을 무척이나 들뜨게 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오늘 집에 온다는 약속만큼은 지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국 그 불안함은 어둠이 짙어지도록 버스정류장에서 서성이던 지섭을 너무도 아프게 찔렀다.
회색빛 노을이 강 너머 하늘에 스름스름 깔리는,그렇게 어두워지는 모습마저 고운 저녁이었다.
강 너머에 사는 규은이도 저 노을을 볼까?

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를 생각할까? 아니면 저 노을을 뒤로 하며 나한테로 오는 중일까?

그런 막연함으로 멈춰 서는 버스를 기웃거리는 지섭의 등을 친 것은 지혜였다.
"오빠, 언니 못 온대. 내가 조금 전에 전화를 다시 했는데,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들어가자.오빠"

돌아오는 길은 쓸쓸했다. 터벅이며 걸어가는 지섭한테서 외로움을 느꼈는지,

바짝 붙어 따라오던 지혜가 팔짱을 끼며
"오빠, 언니하고 만난지 꽤 오래 됐지? 우리 집에 다녀간 게 라일락이 필 무렵이니까,

와..오래 못 봤구나.. 그래서 이렇게 보고싶은가 보다. 오빠, 언니하고 싸웠어?

나한테만 말해봐. 응? 나는 이상하게 언니한테 마음이 막 가더라? 무뚝뚝한 오빠한테 질려선가,

말끝이 다정하고 내 말을 깊이 들어주는 언니가 참 좋아, 나 생각나.
언니를 처음 보던 날, 오빠가 여자친구 있다면서 나한테 자랑하길레, 얼마나 이쁜가 보여달라고 졸랐더니,

오빠가 규은언니 데리고 나왔었잖아,
그 날 언니를 보는 순간, 말하진 않았는데, 내 눈에 눈물이 고였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저렇게 맑은 여자가 있구나...하는 그런 순수에의 동화였을거야.
그 날 언니는 오빠 동생이고, 한참 어린 고등학생인데도 나한테 깍듯이 인사를 하는데,

여지껏 그런 식으로 인사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떤 패배감을 맛봤어.
아, 저 여자한테는 아무에게도 없는 존귀한 의식이 들어있구나... 참 좋은 사람이구나..."
"그랬었니? 나는 기억에 없는데..."
"이긍, 오빠야 그 당시 언니한테 푹 빠져 있었으니까 제대로 느낄 수 없었겠지...

겨우 대학교 일학년인 여자한테서 어쩌면 그렇게 깊은 성품이 우러나는지, 두고 두고 신기했었지.
그런데 오늘 언니가 온다 하고선 안오니까 조금 실망스러워, 분명히 온다고 해놓고선...

근데 오빠, 언니 아픈것 같더라? 뭐랄까? 목소리가 젖어 있었고, 힘이 없었어.

울었나봐...오빠 몰라? 왜 그러는지? 응? "
"응, 몰라"
"왜에... 그러고도 오빠가 남자친구야? 언니한테 고백하진 않았겠지만 오빠는 다짐했을 거 아냐.

미우나 고우나 아프나 즐거우나 규은이의 곁에 있겠으며, 규은이의 아픔을 어루겠노라고....

후후후..이러고 보니까 주례사같다...
오빠, 내일은 오빠가 찾아가봐. 가서 많이 지쳐 있으면 힘이 되어 줘야지..안 그래? 응?

언니 많이 힘들어 보였어.. 내 느낌인데 많이 아파 보였어...응?"
칠월 한 여름인데도 귓볼을 스치는 바람이 끈적하질 않고 선들했다.
그 날밤 지섭은 대학로에서 황당하게 화를 내면서도 뭔가를 참아내던 눈빛을 떠올리며,

규은이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를 오래 오래 듣고 있었다.

작년 5월 초였다.
경제학과와 국어국문학과와의 미팅이 호프하우스 '민들레영토'에서 있었다.

여학생이 적어선지 지섭의 시선은 맞은 편에 앉아있는 여학생한테 자주 꽂혔다.

다른 여학생들은 말도 아끼고 시선을 내리거나 엇비껴 있는데 그 여학생은 그러질 않았다.

이야기하는 남학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흥미있게 들었고, 자기 소개를 할 적에도 망설임없이
'나는 나라 國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국어국문학과를 지망한 정규은입니다.

그러면서도 왜 이 과를 선택했는가는, 앞으로 십 년 후쯤에 어느 일간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인, 정규은. 하하하. 아니구요. 저는 교직을 이수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남학교에 가서 아주 인기있는 국어선생이 되기 위해 이 과를 선택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입을 한참이나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명쾌한 언변이었던지,

정규은이라는 여학생에 대한 호기심어린 소문은 한참을 떠돌았다.
그 날 규은이는 불쑥불쑥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아니면서도 흐름을 쥐고 있는 것 처럼 활발했다.

단지 생맥주를 마시지 못하고 입술만 축일 정도였는데, 자기 소개만큼이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배 하나가 으름짱을 놓으며 잔을 비우라 할 때, 규은이 벌떡 일어나 그 선배를 바라보며
'선배님, 지금 선배님의 주장은 비민주적입니다. 나는 맥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사이다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 내게 이 큰 잔을 비우라 하는 것은 나의 생명을 끊겠다는 일과 같습니다.

술문화도 이제는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절대로 어떤 형식이나 권위에 눌려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비워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선배님이 이 술잔을 정 비우라시면,

저는 학교를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이만큼의 각오인데,저,이 술 마셔야 합니까?"

규은의 논리적인 항의를 듣고만 있던 선배의 얼굴이 처움엔 푸르락거렸지만, 이내 가다듬더니,

규은이를 향해 자신이 그어논 선을 지켜내는 당당함이 아름답다고 했다.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규은의 발랄한 언변으로 살아나고, 다들 노래방으로 2차를 가자면서

흥의 이어짐을 바랐다. 지섭은 정규은이라는 여학생한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규은의 노래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대했다. 호프집에서의 발랄함으로 보아 춤을 추며 노래할 것으로 여겼는데,

규은이 마이크를 잡은 채 눈을 감자마자 바람소리가 들렸다.

지섭도 눈을 감았다. 산바람이 솨아악 솨아악 지섭의 가슴을 훑고 있었다.
그 날 규은이는'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를 불렀다. 노래가 끝날 때 까지 눈을 뜨지 않더니

바람소리가 걷히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선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에 들어왔는데,

그 때 규은의 눈자위는 젖어 있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덕규 作 가시나무 中에서>







팔월 첫 날이었다.
밤새 뒤척이느라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들었던 지섭이 뭐에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근래 며칠동안 지섭의 청각은 먼지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릴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전화는 받자마자 곧 끊겼다. 혹시 규은이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자 뚜뚜거리는 수화기를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잠은 이미 달아났는데도 정신이 멍멍했다. 목이 탔다.찬 물을 마시고 찬 물에 얼굴을 씻어도

의식은 마취에 들기 전처럼 몽롱한데, 입주위가 벌벌 떨리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생각하면 고작 보름정도를 만나지 못한 것에 너무 연연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는 더 많은 날을 떨어져 있어야 할텐데,기껏 이만한 일에 죽을 듯 앓아대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규은이를 처음 만났던 작년 6월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한 날은 이틀을 넘지 않았었기에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무언가 말하지 못하는, 말해서도 안되는 상황이 규은이한테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 두려움은 빠져나가기 힘든 터널이거나 건널 수 없이

동강난 다리같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열시가 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규은이도 일어났겠지 싶어 수화기를 드는데, '내가 연락할 때 까지 전화하지 말라'던

냉랭한 말이 떠올라 방에서 어머니가 뛰쳐나올 정도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평소 안하던 짓을 저지른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지만, 감정의 순환에 용이하지 못한 자신한테서 오는

환멸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무좀처럼 뿌리가 깊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분명한 기회였던 것을 무능해서 놓친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로 인해 덧난 생채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깊은 상처로 번졌다.


어떤 느낌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 하기보다 어떠하든 맞서리라는 용기가 지섭에게 있었다면,

참다 참다 그 날 밤에 전화를 걸었을 때,이미 없어진 번호인 것에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튿날,규은이네 대문을 열고 나오는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 뒷걸음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비어 있었다. 마당도 없이 언덕만이 가파른 집이었지만, 그 곳엔 이미 규은인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저 집에 규은이가 없다니...저 대문을 열고 이젠 나오지 않는다니...

간혹 꿈을 꾸면서도 꿈인 줄 알아 마음놓아지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아니라고,

저 집 어딘가에 규은이는 있다고, 하지만 길바닥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한 낮이 될 때 까지

한 자세로 그 집 앞에 서 있었지만, 그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전혀 본 적 없는 낯섦뿐이었다.
칠이 벗겨진 초록대문을 뙤약볕보다 더 뜨거운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 옹골진 몰두였을까?

언덕 아래로 시선을 내리꽂다 하늘을 올려보는데, 갑자기 어지럽더니 구토가 일며 눈 앞에서

수많은 팔랑개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자글자글한 햇볕이 지섭의 머릿속까지 파고 들었다.

조약돌만 하던 머리통이 에드벌룬만큼이나 커지는 듯 하면서 얼마 후면 뇌에 들어있던 갖은 것들이

빵, 빵, 소리내며 터질 것 같았다. 막막한 기다림은 어이없게도 허기를 몰고 왔다.
그러고보니 엊그제부터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내장이 뒤틀리는지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무렴할 정도로 컸다. 골목 끝에서 그 집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잎을

무성하게 키운 감나무가 팔월 햇살에 반들거리고, 골목 안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았던

그늘이 서서이 골목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그늘 사이로

지난 크리스마스 때, 집으로 들어가는 규은이를 돌려세워 이마에 입술을 대자 퍽이나

수줍게 웃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규은아...규은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름이었다.

주저앉아 머리를 묻고,
'규은아, 나는 너를 찾을 때 까지 저 그늘을 잊지 않을거야,

언젠가 네가 너의 집에는 그늘도 곱다면서 가끔 드리우는 그늘을 밟으며,

지금의 옹색함에 주눅들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잖니...규은아, 그래, 내가 찾을 때 까지

고운 그늘아래 서 있으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빛을 들고 너한테로 가마...꼭 가마...'

그리고는 어제 아침에 전화를 걸어야 했던 규은의 심정을 간접성을 떠나 직접적으로 헤아려 봤다.

아마 그 전화는 지섭에게 걸었던 규은이의 마지막 전화였으리...

규은이는 잘 있으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기에 지섭의 목소리만 듣고 끊은 것 같았다.
그랬다. 규은인 지섭에게 숨어버리려는 자신을 잡을 기회를 주었을텐데,

지섭은 그 기회를 잡아채지 못했다. 그저 기다리라는 날까지 기다리면 될거라는

엷은 안위로 그러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희망만을 새겼을 뿐이었다.


8월 한 달동안 지섭은 참 많은 곳을 헤맸다.

얼핏 규은의 외가가 전주 덕진공원 앞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 낮부터 밤이 이슥할 때 까지 그 주위를 맴돌았다.

긴 여름해는 지섭을 또 어지럽게 했다. 아무래도 서울까지 가려면 네 시간은 걸릴테고,

뱃속을 대충이라도 채워야 내일 또 찾아다닐 수 있겠기에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짜장면이 앞에 놓이자 지섭의 눈자위는 금새 벌개졌다.

규은이는 짜장면을 잘 먹지 않았다. 왜인가를 묻자 짬뽕안에 들어있는 홍합을 일부러이듯 냠냠거리며
"나는 짜장면을 먹기만 하면 체하는데, 아마 신경성인 것 같아, 음...별로 즐겁지 않은 기억에 의해선데,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땐가?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동생이 이불 속에서 누워 있는거야. 그다지 춥지 않은 구월이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가질 않았었는데, 동생은 아니였어.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거든, 그런 애가 얼굴이 벌건하게 달아오르고,

입술이 까칠하게 말라 있는데, 정말 많이 아파보였어.
그 때 우리 엄마는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셨었거든, 아마 동생은 학교를 가지 못했었나봐,

나를 보더니 돈 있냐고 묻더라, 왜 그러냐고 하니까 짜장면이 먹고 싶다는거야. 으음.......짜장면이....

밥 안 먹었냐고 하니까 안 먹었다면서 밥은 먹기 싫고, 짜장면이 무지 먹고 싶다는데,

그 때 내 호주머니에는 십 원도 없었어. 그때 우리한테 용돈은 신기루같은 일이었으니까...

나는 메어오는 가슴을 누르고 동생을 달랬어. 이따 엄마오면 사달라고 하자고...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아냐...언니..안 먹어도 돼. 엄마, 돈 없잖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거야. 지섭씨...
나는 그 때 알았어.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도둑의 심보는 다 갖고 있는 것을 말이야...

당장이라도 중국집으로 달려가서 우리 동생이 아파 그러니 짜장면 한 그릇만 달라고 하고 싶었고,

아무데나 들어가 짜장면 값을 훔치고 싶었어...
정말 그렇게 해서라도 아픈 동생한테 짜장면을 먹이고 싶었는데...내가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오자

동생은 '언니, 나 짜장면 안 먹고 싶어....안 먹고 싶어...'하며 스르르 눈을 감더라구..., 졸렸었나봐.

그 후로 나는 짜장면을 잘 먹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먹다보면 며칠은 고생해,

아무리 씻어내도 춘장냄새가 내 몸에서 내 마음속에서 뭉글뭉글 퍼져나는데.......

그럴 때면 조금 슬프다? 하하하. "


결국 지섭은 짜장면을 입에 대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그 이튿날 새벽 두시쯤에 규은의 어머니가 일한다는 신문보급소 앞에서 기다렸지만,

한 달 전에 그만뒀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 아주머니 건강이 아주 안 좋아졌다 하더구만, 하기사 그전부터 안 좋아보이긴 했어,

그 몸으로 신문을 돌리기는 무리였지. 뭐라더라? 갑상선 뭐라 했는데...

아무튼 일을 못하게 됐다 하더구만'
그랬구나, 어머니가 몹시 편찮으셨구나...
그 날 이후로 지섭은 서울시내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숍뿐만이 아니라 지나치다 혹시?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라면

망설임없이 들어갔다. 하지만 어디에도 규은이는 없었다. 하기사 무작정 찾아 나선 길이었으니

만나지 못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만 얼마나 시각과 촉각을 세우고 다녔는지

병을 앓는 사람처럼 창백하기가 창호지같았다.
밤마다 잔뜩 초췌한 낯으로 들어서는 지섭을 본 지혜는 그전처럼 규은에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당위를 위해 지금껏 쌓아올린 관계를 가차없이 허물어뜨릴 수 있는 여자를 찾아 다닌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우매한 일이라며 힐난했다.

적어도 사랑했다면, 사랑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남은 자의 아픔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하고,
기다리거나 잊거나의 선택권을 줬어야 한다는데, 사실 맞는 말이었지만 하마트면 지혜한테

주먹이 날라갈 뻔 한 날도 있었다. 그만큼 지섭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해져 갔고,

자신 이외의 것은 먼지만큼도 받아들이기 벅차도록 지쳐있었다. 그래도 기다렸다.

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돌아오리라, 잠시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그동안 복잡했던 마음을 내던지고 전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내 옆에 서리라...
입술을 깨물며 자위했지만, 이미 규은인 휴학을 한 상태였다.

자퇴가 아니라 휴학이라는 것에 지섭은 또 꿈을 꿨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진달래처럼 개나리처럼 아니 강한 쑥부쟁이처럼 돌아오리라고 꼭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허나 지섭은 내년 2월이면 입대를 해야 했기에 돌아오는 규은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입대를 늦춰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어쩌면 이 길이 앞 날을 다지는 디딤돌같은, 마땅한 순리같아 따르기로 했다.

막상 연기를 하고 기다리는데 규은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절망을 어찌할 셈인가?

지섭의 정신적인 한계는 그 좌절을 이겨내기엔 웅덩이가 너무 얕았고, 뿌연하니 아득하기만 했기에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규은이가 돌아와 예전처럼 당당하게 살고 있을거라 믿고 싶었다.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까, 있다면 다다를 수 있는 실체적인 것일까?
그 해가 다 가도록 지섭이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였다.
그 길이 나갈 곳을 찾을 수 없는 미로이든 아득하게 먼 곳이든 가야한다고,

그건 이미 예정된 운명이었기에 거스를 수 없다고,

입대하기 전 날 밤 규은이 살던 집을 서성이며 다짐했다.


봉천동 언덕길을 오르는데 어쩌면 이 길을 오래도록 걷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선지,

숨이 가쁠 정도로 감정이 치받쳤다. 허나 지섭은 숨을 뱉지 않고 입안 가득 모았다.
그래야만 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많이도 힘들었을 규은이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일 미터 육십도 되지 않는 작은 몸으로 땅은 멀고 하늘은 가까운 이 언덕배기에 서서 규은이는

어떤 희망으로 기도했으며, 어떤 절망으로 아파했을까? 잔설이 희끗희끗한 관악산을 바라보며,
저 곳 어디엔가로 꽂혔을 규은의 눈빛을 그리워했다. 맵찬 바람이 지섭을 통 째 흔들었지만, 끄덕하지 않았다.

규은이 서 있던 곳인데, 규은이 바라보던 하늘인데...이깟 추위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아물거리는 눈길을 내려 휘황하게 밝은 도시를 보았다.
먼 야경이 가까이서 볼 때보다 오히려 살갑게 느껴지는데, 불현듯 규은이 저 불빛같았다.

잡을 수 없이 먼 빛, 하지만 그 빛줄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어둠의 끝이 나타날 것 같았다.

기다림의 정점이라고 해도 좋을 먼 빛바라기였다.

규은이 달빛같은 웃음을 지으며 들어가던 초록대문을 만지자 정신이 번쩍 났다.

섬뜩하도록 차가운 감촉이 여지껏 풀어졌던 의식을 찌르는데 마치 이만한 현실에 허둥대는 지섭을 꼬집는

규은의 나무람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규은아, 나는 잘 견딜 수 있어, 잘 견뎌낼거야...'

술에 취한 사람의 배짱을 담아 크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 그 다짐을 규은의 희망과 절망이 움트고 가지쳤을 집 주변에 가득 심어놓는 일이진도 몰랐다.

골목을 빠져 나오며 지섭은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서는 손을 흔들었다.
마치 규은이 초록대문 앞에서 웃고나 서 있는 듯이, 지섭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빙그시 웃고도 있는 듯이...가슴이 벌떡였다. 도저히 이대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규은이 오랜 날을 걸어가고, 걸어왔던 길을 되밟았다.
살금살금한 걸음으로 어느 날은 힘차게 어느 날은 축 늘어져 걸었을 규은의 길을 눈안에 넣으며

조금전처럼 큰소리가 아닌 혼잣말로 규은에게 기다림을 남겼다.
"규은아, 기다릴거지? 응? 내가 올 때 까지 눈이 부시도록 봉오리가 벙글고 화사한 벚꽃보다.

받은 사람보다 준비하는 이의 마음을 더 설레게 하는 장미꽃보다

나를 낮춰야 보이는 제비꽃한테서는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겸손을 배우게 된다고 ,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고 했던 제비꽃처럼 기다리고 있을거지?




장승처럼 우뚝하니 서 있던 나목이 가로등 불빛에 어른대도록 자신의 모습을 흔들고 있었다.
규은이 알았다고 끄덕이듯이, 그러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선 내일 떠날 일이 그다지 두려워지지 않았다. 간다. 이미 예정되었던 운명을 나는 걸어간다...
주정같은 흥얼거림은 언덕을 내려오는 내내 이어졌고, 유리알처럼 반질거리는 얼음판을

쭈르르 미끄럼타며 내려가는 개구쟁이로까지 만들었다. 결국 어느 집 세멘벽을 잡고서야

정신없이 빠르게 내려온 길을 멈출 수가 있었는데, 엉덩이를 털며 지섭은 바람했다.

부디 규은이한테 가는 기다림의 길이 이처럼만 쭈르르...쭈르르...순했으면, 하는 절절한 애상이었다.

1995년 2월 23일, 지섭은 춘천 102보충대로 입소하기 위해 청량리역으로 들어섰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을 두고 아쉬움에 젖어 있었다. 외로웠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럴 줄 알았다면 따라오겠다는 어머니나 지혜를 말리지 말 것을....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규은의 안타까운 배웅을 받지 못한 채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많이 상심할 것 같아서였는데, 들어설 틈 없이 꽉 찬 대합실에서 지섭은 오소소한 한기를 느꼈다.

지독한 괴리감이었다.
거울로 슬핏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서먹했다. 모자를 더 눌러썼다.

그래도 가려지지 않는 낯설음에 지섭은 입술을 깨물고 춘천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섰다.

아쉬움이 잔뜩 스민 웅성거림은 차창밖이나 열차안이나 마찬가지였다.
헤어진다는 것은 저만치나 가슴아픈 일인데, 이것은 약속할 수 있는, 이별이 아닌가?

부산스럽게 나불대는 많은 사람들의 손짓을 보며 지섭은 자신이 넓은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배이거나,

삼 사월이어도 녹지 않고 호수 위를 떠 다니는 얼음덩이로 느껴졌지만, 이내 그 허튼 생각을 지우고

작년 일월, 규은의 생일날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예정된 운명으로 가는 길에 순응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규은의 생일은 1월 17일이었다. 그래서 나이는 지섭보다 한 살 어렸지만 학번은 같았다.

다른 날에야 떡볶이나 김밥, 칼국수를 먹어도 됐었지만 오늘만큼은 생일이니까

더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다하는 지섭의 마음을 혀를 낼름이는 걸로 물려내며,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근심이 늘고, 안 먹던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거라며

늘 먹던대로 김밥과 메밀국수를 먹자며 환하게 웃는데, 문득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 핀 들길을 걸어가는 소녀가 떠올랐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애잔한, 그러면서도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마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이었다.

얼음가루가 둥둥 떠 있는 육수에 메밀국수를 적셔 먹던 규은이 영화를 보자하는 지섭의 말을 꺽어

노래방엘 가자고 했다. 음악을 즐겨 듣기는 해도 부르기를 내켜하지 않던 지섭이 규은을 좋아한게 된 것도

어쩌면 가시나무를 부르며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서던 것이었기에 마다하지 않고 앞장섰다.
그동안 봐서 알아진 것이지만 규은인 활달하고 직선적인 성격만큼 친구가 많지 않았다.

처음 느낌으로는 공부할 틈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학생이 드문 과라서 같이 쇼핑을 하거나 취미를 돋울 친구가 없기도 했겠지만,

지섭이 옆에 없으면 늘 혼자였다. 혼자 교정을 걸어 나가고,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그런 규은을 두고 친구들은 미스테리한 여자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정규은이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세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딱할만큼 분명하게 두고 있었으며, 소유하지 못할 것에 대해선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는, 냉철함이 의식안에 가득찬 여자라는 것이었다.
때로는 규은이의 그런 면이 지섭을 힘들게 하고 화나게도 했지만, 얼렁뚱땅하지 않는 규은만의

삶의 관점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곰팡이처럼 시간이 발효시킨 오롯한 긍정이었다.

그 날도 규은이는 첫 곡으로 이승철의 '노을, 그리고 나'를 불렀다. 늘 그랬다.
평소에는 재잘거리며 자신의 넉넉하지 못한 점을 부끄럼없이 말하면서도 노래방에만 가면

숲으로 내려앉는 안개처럼, 숲을 떠다니는 물방울처럼, 얼음 아래를 헤엄쳐다니는 송사리처럼 차분했다.

아니 너무 깊었다. 규은이는 노을을 늘 먼저 노래했다. 어느 날은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부르며

눈동자를 발그레이 붉혔는데, 그러고나서 머리를 저어 천장을 올려다보던 규은한테선 정말이지

노을빛이 짙게도 배어 있었다.
무엇이 저토록 규은을 아리게 하는가, 지켜보기만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규은이는 '노을, 그리고 나'의 1절을 늘 그러했듯이 눈을 감고 불렀다.정규은...그녀는
눈을 잘 감았다. 햇빛이 조금만 들이쳐도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는데, 그러면서 중얼거리기를,

햇빛이 싫다고, 더러 저 햇빛줄기가 혈관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데 ,
그럴 때면 외가의 골방이 그리워진다고,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캄캄한, 일년내내 햇빛이 들지 않아

써금써금한 냄새가 물씬한 외진 방에서 오래도록 숨어있고 싶다고,

지섭으로선 아는 체 하기 난처한 정서를 흘리곤 했었다.
그래서 노을이 좋다고.., 찌푸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왠지 햇빛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의 무게감에 짓눌려 눈조차 뜨기 힘든 가난같고,

노을은 누구한테나 같은 양만큼의 안온과 같은 무게만큼의 위안을 담아 주는 공평한 부자같아서 좋다고...

말하는 규은이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지섭은 막 번지기 시작하는 노을을 따라 동경했다. <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건 떠나가는 햇빛의 울음일까

아무말 없이 그렁그렁 맺혀진 너의 눈물 이젠 알듯해

머물다 떠난 시간만큼만 앞으로 괴롭다면 괜찮겠지

허나 넌 알까 피빛 울음을 삼킨 저 노을같은 내 마음을

아무말 없이 그렁그렁 맺혀진 너의 눈물 이젠 알듯해 - 이승철 '노을, 그리고 나'의 일부 >




지섭은'겨울아이'를 예약하며 처음으로 규은이를 위해 노래부르는 게

떨리면서 설렜고고, 기쁘면서도 뭉쿨했다.

겨울아이의 낭낭한 전주가 흐르자 지섭은 규은을 일으켜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쉬잇! 했다.

규은인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꾹 감고선 장난스레 귀까지 모았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 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지섭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규은이를 가만히 당겨 안았다. 들풀향기가 났다. 머리카락에서도 목덜미에서도

푸릇한 풀내가 풍겼다. 훔훔거려 규은의 냄새를 자신의 후각상자에 담았다. 세월이 흘러 어디에서든

눈을 감고도 이 풀내음으로 규은을 찾아낼 것 같았다.그만큼 그녀의 향기는 독특했고

보송보송한 풀더미를 덮고 누운 듯 아늑했다. 또 초가을의 새벽처럼 청초했다.
규은이는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몽땅 뿜어내다시피 하고서도 노래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다.

대부분 비트가 애절하면서도 서정적인 발라드였다.
목의 힘줄이 톡톡 튀어오를만큼 감정을 실어 노래부르는 규은한테선 광기마저 엿보이곤 했다.

더 깊은 곳으로의 함몰을 원하는 자학같기도 하고, 미처 터트리지 못한 자아의 돌출이기도 했다.
그 날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는 김현식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였다.

한 소절 한 소절을 잇는 규은의 목소리는 안개비 내리는 새벽처럼 잔잔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 울고 싶다고 울 수 있는 건 아니야
못다 푼 신명에 뒤돌아보면
바람 같은 목소리 흩어지는 바람소리
사랑인줄 믿었는데 바람인줄 몰랐는데
이제 와서 가슴 시린 바람이었어. 김현식-바람인 줄 알았는데 일부>

톡 건들면 우수수 떨어지는 봉숭아씨앗처럼 간신히 울먹임을 누르며 규은인 정말 바람이듯,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무당의 흰 치마폭처럼 슬프디 슬프게 불렀다. 그리고서는 씨익, 사금파리처럼

희디희게 웃었다. 그렇게 혼을 뺄 정도로 부르고도 아쉬운 게 있는지 마이크를 제 자리에 꽂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잠깐만, 잠깐만 지섭씨, 나 아저씨한테 갖다올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하며 문을 열고 뛰어나가더니
'앗싸! 아저씨가 서비스로 10분 더 넣어줬어. 지금부터는 내가 지섭씨를 위해 부를 시간이야,

여지껏은 나만을 위한 노래였는데, 지금부터 부르는 노래는 온전히 지섭씨한테 바치는 노래니까 잘 들어둬,
잘 들어두면 언젠가는 꼭 기억날거야. 쓸쓸하게든 가슴벅차게든, 이 노래가 생각나고,

이 노래를 불렀던 나도 생각나고, 이 노래를 들으며 나를 바라봤을 지섭씨 자신도 생각날거라고....'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노래책자를 넘기는 규은의 반쯤 숙인 얼굴이 참 예뻤다.

단정한 콧날이며 어릴 적에 짱구라고 놀림을 받았다는 됫박이마의 불툭함이 오히려 귀엽기까지 했다.
노래를 찾아 예약을 하고나선 이마를 쓰윽 문지르며 웃는데, 이마에 얽힌 규은의 유년을 상상하고 있었던

지섭이 크크거리며 웃자 지섭의 볼을 톡 치며

"윤지섭씨, 지금부터 부르는 노래를 잘 들어주세요. 음... 이 노래는 앞으로는 부르지 않을,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괜히 딴 생각말고 나, 정규은만 바라보세요,

알았지요? 윤지섭씨? 으음... 시간이 없으니까 이 노래를 부르게 된 동기는 이따 말하기로 하고,

우선 두 곡을 연달아 부르겠습니다. 후훗"

<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손흔드는 사람들속에 그댈 남겨두긴 싫어

삼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
기다리지 말라고 한건 미안했기 때문이야

그곳의 생활들이 낯설고 힘들어
그대를 그리워하기전에 잠들지도 모르지만

어느날 그대 편질 받는다면
며칠동안 나는 잠도 못자겠지

이런 생각만으로 눈물 떨구네
내 손에 꼭 쥔 그대 사진위로. 김민우- 입영열차안에서 일부>

<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김현철- 춘천가는 기차 일부>

입대날이 가까워지면서 지섭은 규은이 잘 기억하라며 들려줬던 노래가 떠오르지 않기를...

그냥 날리는 꽃잎같이 금세 금세 기억속에서 사라져줬으면 했다. 그만큼 절망어린 메세지였다




노래방에서 나온 규은이 배가 출출하다며 떡볶이를 먹었으면 하기에 이번엔 내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우겨선,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겨우 김밥 한 줄과 메밀국수 몇 가닥으로 배를 채우고

노래를 불러댔으니 배가 고프긴 고팠는지, 규은인 함박스테이크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섭은 모처럼 포만감에 빠졌다. 저토록 여유있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

규은에게 많아지기를...또 그런 날을 지섭이 채워 줄 수 있기를

고기를 한 조각 떼어 규은의 접시로 얹어주며 바람했다.
고기조각은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 결국 규은이 먹었는데, 지섭은 그 날을 거기까지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 후는 찍히지 않은 필림처럼 하얗게 남아있기를.... 주먹을 우두두둑 꺾으면서 아파했다.

그런데도 그 날이 떠오르면 온전한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어서 잘 마시지도 않는 술집 앞에서 머뭇거리곤 했다.
의식을 잃을만큼 취해 자신한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떠도는 모든 기억의 편린들을 쪼각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번개에 맞아 까맣게 타버린 어느 폐허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지섭을 바라보며 뭔가를 진중하게 감내하던, 그러면서도 억울해하지 않던

규은의 특이한 순수를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잔뜩 기대하기도, 또는 노랫말이 주는 의미를 곱씹느라 침울한 지섭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규은이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 지섭에게 건네며
'참 아까 노래방에서 못한 이야긴데, 지섭씨. 내가 왜 입영열차와 춘천가는 기차를 불렀는지 알아?

모르지? 모를거야. 그냥 좋아하는 노래라서? 으음.. 아냐..

아까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겁없이 치민 생각에 의해선데, 으음...
어떤 예감에서야. 2학년 마치고 군대에 간다고 했지? 음..그런데, 나는 지섭씨 군대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할 것 같아..모르겠어.. 그 이별을 견뎌낼 수나 있는건지...

그냥 괜히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 왜 그럴까? 기다림이 슬픈 이별이라선가?
아닌데...서로 있는 곳을 몰라 애타는 생이별도 아닌데...왜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지지?

26개월이라는 세월이 너무 아득해서? 아니. 절대로.

나는 세월이 주는 기다림이나 고통에는 익숙해져 있거든, 그런데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드니..
.나도 참.... 아무튼 그래..그리고 지섭씨는 논산이나 뭐 다른 데가 아니고 경춘선을 타고 입대를 할 것 같아..

뭐 예감이니까 믿지 않아도 돼. 예감이니까...제발 틀리기를 바라야 하는 슬픈 예감? 후훗"
'그런 말이 어디있니? 누가 그런 예감하라고 그랬어?"
지섭이 볼부은 소리로 탓을 하자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던 규은이 가늘게 웃더니
"지섭씨,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니까.. 나는 말이지

아마 무당이 될 팔자인가봐, 꿈도 잘 맞아 떨어지는 편인데, 엄마와 꿈에 다투면 그 날은

밤늦게라도 부딪치게 되더라구, 아무리 조심해도 꼭 꿈땜을 하더라니까?..신기하지?
한 번은 동생의 졸업앨범을 보면서 얘는 성격이 어떻다는 둥, 쟤는 원만하고 공부도 잘하겠다고 하면

얼추 맞는다는거야, 그러니까 반 점장이인 셈이지. 하하하. 더 웃기는 건, 아니다 이건 웃기는게 아니다.

사실은 두려운 거다. 뭐나면 동생이 가위를 갖고 종이를 자를 때
내가 너 조심해, 안 그러면 네 손가락 베일라. 하고나서 얼마 안 있으면 동생의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밥을 먹는데 한 숟갈 먹고 자리에서 뜨고, 와서 앉는 것도 산만할 때가 많아. 그럴 때 내가

... 너 그러다 물 엎지르겠다..하면 정말 물을 엎지르곤 했어. 이건 예감도 아니고 예단도 아니고.. 뭘까...하는

생각에 내 스스로가 가끔씩은 섬뜩해지는거야...앞날을 조금이라도 맞춰 낼 수 있다는 게 그다지

좋은 일 같진 않았어. 그러다보면 내가 무슨 저주를 받고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신의 지지를 받는 대단한 아이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어. 결코 상쾌할 수 없는 예언이랄까?

그런데 얼마전부턴가 지섭씨 군대가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야.

정말 정말 황당하고 엉뚱한 상상이겠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 입영열차를 부른건데, 오늘 지섭씨가 내 생일이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노래도 실컷 부르게 해 줬잖아, 그러니 어떡해...나도 뭔가 보답을 하긴 해야겠고...

그래서 선물이라긴 뭐하지만, 기억속에 남을 만한 것을 주고 싶은데, 음..

혹시 입영전야를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내가 미리 준 선물을 생각하면서 너무 쓸쓸해하지 말고,

군대 잘 다녀오라고...알았지? 잘 다녀와야 해. 내가 없더라도...

내가 지섭씨 곁에 있을 수 없게 되더라도...응? 응?"